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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신체탐구

폐경기 이후 ‘냄새 기억력’ 저하의 신경 생리학적 이유

by hhs1205 2025. 6. 14.

냄새는 단지 향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잊고 있던 감정을 깨우는 가장 본능적인 자극입니다.

하지만 많은 폐경기 여성이 갑자기 좋아하던 향이 낯설게 느껴지고, 익숙한 냄새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후각 세포의 노화나 감각 둔화 때문만이 아닙니다. 냄새에 얽힌 기억력 자체가 흐려지는 배경에는, 뇌와 호르몬, 감정회로 간의 미세한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신경생리학적 변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에스트로겐과 해마, 후각피질의 연결, 기억 전환 시스템의 변화 등 ‘냄새 기억력’ 저하가 생기는 과학적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폐경기 이후 ‘냄새 기억력’ 저하의 신경 생리학적 이유

후각과 기억의 특별한 연결 구조: 후각은 가장 먼저 뇌로 도착하는 감각입니다

다섯 가지 감각 중 후각은 가장 원시적이며, 동시에 가장 감정과 밀접한 감각입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은 모두 감각 입력 후 시상(Thalamus)이라는 뇌의 중계소를 거친 뒤 대뇌피질로 전달되지만, 후각만은 예외입니다.
후각은 시상을 우회해 곧바로 대뇌변연계(Limbic System)로 직행합니다.

이 대뇌변연계는 바로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정서 시스템으로, 그 안에는 해마(Hippocampus), 편도체(Amygdala), 후각피질(Olfactory cortex)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즉, 냄새 자극은 뇌에서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감정·기억 회로와 접속되는 신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서 맡던 된장찌개 냄새, 첫사랑이 쓰던 향수, 여행지의 바닷바람 냄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순간적으로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후각이 감각-감정-기억을 동시에 저장하고 불러오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경이 다가오면서 이런 ‘후각을 통한 기억 호출’ 능력이 서서히 약화합니다.
냄새를 맡기는 하는데 감흥이 없고, 향기에 따라 떠오르던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바로 이 감각적 경로와 뇌 기능의 연결성이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에스트로겐 수용체의 감소와 뇌 기억 회로의 약화: 후각기억이 먼저 흐려진다

폐경기 이후 나타나는 냄새 기억력 저하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에스트로겐 감소에 따른 해마(기억 저장소)의 기능 저하입니다.

에스트로겐은 단지 생식기관에만 작용하는 호르몬이 아닙니다.
중추신경계 전체에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해마(hippocampus), 후각피질, 전두엽 피질에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합니다.
에스트로겐은 이 부위에서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유지하고, 시냅스 연결을 강화하며, 기억을 안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해마에 있는 시냅스의 수는 에스트로겐 농도에 따라 가역적으로 변화합니다.
에스트로겐이 풍부한 시기에는 기억력, 감정 조절, 감각 통합 능력이 훨씬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유지됩니다.
하지만 폐경기에 접어들면서 에스트로겐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면, 해마와 후각피질 사이의 정보 전달 속도와 효율이 떨어지고, 그 결과 ‘냄새로 기억을 불러오는 회로’에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예전 같으면 특정 향만 맡아도 금세 떠올랐던 장면이나 감정이 이제는 희미하거나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냄새를 감정과 연결해주는 신경 다리의 민감도가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후각세포 자체도 재생력이 떨어지고, 코 안의 점막에서 냄새 분자를 받아들이는 수용체의 기능도 감소하기 때문에 ‘냄새 감지력’과 ‘기억 연결력’이 동시에 약해지는 이중 감퇴 현상이 나타납니다.

 

후각 감퇴는 인지기능 저하의 선행 신호일 수 있다

냄새를 잘 맡지 못하게 되는 현상은 단순한 감각의 문제를 넘어, 인지 기능 전반의 저하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알츠하이머형 치매 환자 중 상당수가 가장 먼저 경험하는 증상이 후각 저하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해마와 후각피질은 동시에 위축되며, 두 부위 모두 에스트로겐 의존성이 높기 때문에, 폐경 후 변화가 가장 빨리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에서는 50대 후반 여성 중 후각 감퇴를 자각한 그룹이 5년 뒤 기억력 테스트에서 평균 이하의 점수를 보일 가능성이 1.8배 높았다는 결과도 있습니다.
또한 PET(양전자단층촬영) 검사에서는 후각과 관련된 피질 활성도와 해마 부피 감소가 일관된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즉, 냄새 기억력이 약해졌다는 건 단지 ‘코가 둔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뇌의 특정 회로가 기능 저하 단계에 들어섰다는 조용한 경고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각 변화는 시력이나 청력과 달리 명확한 수치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나이 들어서 그렇겠지’ 하며 방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후각 기억력 저하는 조기 인지 저하의 가장 민감한 지표 중 하나로, 폐경 이후 여성의 건강 체크리스트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항목입니다.

감각은 회복된다: 냄새 기억력 개선을 위한 실질적 루틴

다행스럽게도, 갱년기 이후 약화된 후각 감각과 냄새 기억력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회복 가능한 영역에 속합니다.
뇌와 감각 시스템은 일정 수준의 자극과 반복 훈련을 통해 가소성(plasticity)을 회복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잊혀진 기억 회로도 다시 자극될 수 있습니다.

먼저, 일상 속에서 의식적으로 후각을 자극하는 루틴을 만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단순히 냄새를 '맡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도적으로 향기를 감지하고 감정과 연결하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갓 내린 커피향을 깊게 들이마신 뒤 그 향이 떠오르게 하는 과거의 장면이나 감정, 장소를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라벤더, 유칼립투스, 혹은 자주 쓰던 바디워시 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그 냄새에 얽힌 정서를 되살리는 것도 좋습니다.
이러한 루틴은 냄새→감정→기억의 연결을 점차 복원시키는 훈련이 됩니다.

또한, 에스트로겐 수용체의 민감도를 유지할 수 있는 식이 습관도 도움이 됩니다.
대표적으로 콩, 아마씨, 석류, 들기름 등에 풍부한 식물성 에스트로겐(피토에스트로겐)은 뇌 내 호르몬 수용체의 반응성을 일정 부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식품들을 일상 식단에 규칙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기억 회로의 안정성과 후각피질의 기능을 함께 돕기 위해서는 오메가-3 지방산, 비타민 D, 콜린, 비타민 B군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도 권장됩니다.
이 성분들은 신경세포막의 유연성을 유지하고 신경전달물질의 원활한 생성과 전달을 도와줍니다.
실제로 오메가-3는 시냅스 연결 회복과 후각세포 재생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불어, 명상과 향기 자극을 병행하는 루틴은 감각-감정 회로를 함께 자극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아로마 디퓨저나 향초를 사용하면서 심호흡을 하거나 눈을 감고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 뇌는 후각 자극과 감정 안정 자극을 동시에 받으며 기억 회로를 더 효과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각 감퇴가 두드러지거나 기억과 감각이 모두 흐려지는 느낌이 지속될 경우에는 병원에서 후각 기능 검사를 통해 조기에 상태를 확인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후각 감퇴는 종종 인지 저하의 초기 신호로 작용하기 때문에 미리 기능 저하 여부를 파악하고, 필요시 생활 습관을 조정하는 것이 향후 기억 건강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냄새 회복’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 감각의 연결을 다시 튼튼히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일상 속에서 천천히 감각 회복 루틴을 시작해보는 것이 폐경기 이후 삶의 질을 지키는 데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이 흐려진 게 아니라, 감각의 연결이 잠시 끊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향기를 통해 감정을 기억하고, 감정을 통해 시간을 되새깁니다.
그만큼 냄새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삶을 저장하는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
갱년기 이후 냄새에 둔감해졌다는 것은, 단지 감각의 쇠퇴가 아니라 그 언어를 잠시 잃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중요한 건 나의 감각에 다시 말을 걸어주는 일입니다.
억지로 기억을 끌어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향과 함께 있는 감정을 찬찬히 마주하고,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시 떠오르지 않는 기억 때문에 속상해하지 마세요.
당신의 감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금 느리게 반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지금 당신이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따뜻하게 자신을 돌보는 과정 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